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어른이었을까
이 질문을 다시 꺼내게 된 이유
최근 백남준 작가의 K-456관련 강연을 하면서 관객석에서 미래의 아이들에게 AI로봇 등의 기술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들었다. 그에 대해 이런저런 답변을 하면서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질문을 가져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몇 번이나 멈췄다. 도라에몽을 다시 읽는 일이 과연 지금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이미 수없이 소비된 이야기를 또 꺼내는 건 아닐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질문을 내가 던질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기술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질문이 떠오르면 AI에게 묻고, 답을 받아 적고, 이미지를 만들고, 추천된 선택지를 고른다. 기술은 아이들보다 빠르게 진화했고,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당황하는 쪽은 언제나 어른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아이들에게 AI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런데 이 질문을 곱씹을수록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아이들은 이미 기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을 쓰는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선택과 결과를 함께 감당해야 하는 어른의 태도다.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우리는 어떤 어른이었을까. 이 질문은 그래서 아이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어른에게 되돌아오는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은 새롭지 않다
AI 시대의 불안은 새로워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 장면을 반복해서 상상해왔다. 기술이 아이의 삶에 개입하고, 아이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 채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고, 결국 어른이 그 뒤를 수습하는 이야기. 이 구조는 낯설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늘 이야기 속에서, 만화 속에서, 웃으며 소비해왔을 뿐이다.
도라에몽은 미래에서 온 로봇이다. 어디로든 문, 타임머신, 기억을 복사하는 도구, 언어를 통역하는 장치들까지. 지금 우리가 첨단 기술이라고 부르는 상상 대부분이 이미 그 주머니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술들은 늘 완벽한 해결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잠시 미뤄지거나, 더 복잡해지거나,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는데, 아이는 그만큼 성장하지 않는다.
이 반복은 우연이 아니다. 도라에몽은 기술의 실패를 통해, 기술이 아이를 대신 성장시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실패의 자리에 언제나 어른이 남겨진다.
이 글을 쓰는 방식 또한 질문의 일부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나는 AI와 함께 사유하고 문장을 고쳤다.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 역시 이 연재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을 던진 문장조차 AI가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 걸까. 문장을 생산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 문장이 나에게 던진 질문 앞에 서 있는 일인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도구를 쓰며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아마도 답은 문장의 출처가 아니라, 그 질문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는지에 있을 것이다. 기술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책임질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이 감각은 낯설지 않다. 도라에몽의 도구를 손에 쥔 노진구가 늘 같은 자리에 서게 되는 것처럼, 기술은 늘 문제를 앞당겨 보여주지만, 선택과 책임의 자리는 어른에게 남겨진다.
문화기술이라는 거리
이 칼럼은 도라에몽을 추억하거나 도구를 나열하는 리뷰가 아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문화기술이라는 거리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가 아니라, 그 기술이 사회 안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고, 어떤 선택을 유도하며, 어떤 책임을 남겼는지를 묻는 방식이다.
대학원 시절부터, 한 선생님이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하며 같은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연구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기보다는, 같은 이야기 안에서 시대가 바뀔 때마다 선생님의 관점에서 달라지는 질문을 포착하는 작업처럼 보였다. 그 과정을 보며 나는 대중 콘텐츠가 가볍게 소비되지만, 결코 가볍게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품게 된다는 것도.
도라에몽은 그런 콘텐츠다. 기술이 바뀌어도, 아이와 어른의 관계가 남아 있는 한, 이 이야기는 계속해서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
이 연재가 향하는 방향
이후의 글에서는 도라에몽의 도구들을 하나씩 꺼내어 살펴볼 것이다. 이동과 공간, 기억과 학습, 언어와 소통, 예측과 통제, 감시와 보호라는 다섯 개의 축을 따라, 기술이 아이의 삶에 어떻게 개입해왔는지를 분석한다. 각 글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남길 것이다. 이 질문은 아이를 향하지 않는다. 기술을 허용하고, 제한하고, 결국 그 결과를 떠안게 되는 어른을 향한다.
이 글이 다소 느리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단정하고 싶지 않다.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진보할 것이고, 아이는 기술의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는 여전히 어른의 몫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을 쉽게 던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반복해서, 다른 각도에서, 다른 도구를 통해 계속해서 묻고자 한다. 도라에몽은 이미 오래전에 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