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가진 아이〉 02-4. 가공수면 펌프
현실 위에 입혀진 가짜 바다: 환경 가공의 마법
도라에몽의 도구 중 '가공수면 펌프'는 참으로 재미있는 장치다. 자는 동안 이 펌프를 작동시키면 바다가 아닌 곳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펌프로 퍼 올린 '가짜 물'은 순식간에 골목과 마당을 채우고, 평범한 동네는 어느새 거대한 바다로 변한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잠수를 하며 진짜 바다에 들어온 것처럼 일렁이는 달빛을 따라 헤엄친다. 하지만 이 물은 만져지지도, 옷을 적시지도 않는다. 특수 고글을 끼고 오리발을 신어야만 헤엄을 칠 수 있다. 조작을 멈추는 순간 가짜 바다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원래의 메마른 풍경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현실을 직접 파괴하거나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장소를 옮기지도, 시간을 건너뛰지도, 나의 크기를 조절하지도 않는다. 대신 현실이라는 바탕 위에 전혀 다른 조건을 '덮어씌울' 뿐이다. 환경을 가공함으로써 그 안의 인간이 겪는 경험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문제는 그대로인데, 문제를 둘러싼 맥락만 일시적으로 달라지는 셈이다.
02장의 완성: 나에서 환경으로의 확장
우리는 지난 칼럼들을 통해 기술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살폈다. '어디로든 문'에서 공간을 단숨에 넘는 기술을 보았고, '타임머신, 서랍'에서 시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욕망을 읽었다. '빅라이트'와 '스몰라이'에서는 나의 비율을 바꾸며 세계를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실험을 했다.
이제 이 마지막 장에서 변화는 더 이상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나의 선택이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 전체의 변형으로 확장된다. 가공수면 펌프는 개인의 주관적 변화가 곧 외부 환경의 가상적 변형으로 이어지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맞춰 변화하기를 꿈꾸는 현대 기술의 욕망이기도 하다.

현실을 미루는 기술, 남겨진 책임
아이들에게 이 도구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지금 서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도 전혀 다른 세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제약은 그대로인데, 체험의 수준과 밀도는 달라진다. 그러나 이 마법 같은 변화에는 치명적인 전제가 있다. 바로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가공된 환경은 임시적이며, 장치를 끄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여기서 위험한 신호가 발생한다. 현실을 끝까지 통과하거나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회피의 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을 덮어씌우는 기술이 일상화될수록,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문제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조건을 먼저 찾게 된다. 불편하면 가리고, 어려우면 다른 조건을 입힌다. 가공수면 펌프는 현실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교묘하게 외면하게 만드는 기술이기도 하다.
다시 마른 땅 위로 돌아오는 법
도라에몽의 세계에서 이 가상의 실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가짜 바다는 결국 사라지고, 아이는 다시 딱딱하고 마른 땅 위로 돌아온다. 이때 남는 것은 오직 체험의 기억뿐이다. 자유롭게 헤엄쳤던 감각과 그 모든 것이 기술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자각이다. 아이는 깨닫는다. 환경을 가공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환경 안에서 살아야 할 책임까지 함께 가공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지점에서 가공수면 펌프는 02장의 긴 여정을 완성한다. 공간과 시간을 넘고, 나의 비율을 바꾸며 환경까지 조절할 수 있는 세계에서, 결국 우리가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다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기술은 현실을 가려주는 막이 되어줄 수는 있지만, 그 현실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어른의 역할은 바로 이 귀환의 지점에서 호출된다. 아이가 가상 환경에 매혹될수록, 어른은 그 조건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묻는 존재여야 한다. 가공된 꿈이 끝났을 때, 아이는 무엇을 가지고 현실로 돌아오는가. 찰나의 즐거움인가, 비겁한 도피인가, 아니면 현실을 새롭게 마주할 용기인가.
가공수면 펌프는 우리에게 말한다. 현실을 덮어씌우는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태도라고. 환경은 얼마든지 설계할 수 있지만, 그 환경을 빠져나온 뒤의 선택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렇게 02장의 긴 탐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떠나지 않고, 되돌아오며, 결국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로.
*가상 조건 설계와 환경 시뮬레이션 현실을 직접 변경하지 않고, 특정 조건을 가상으로 입혀 행동과 결과를 실험하는 기술적 방법론이다. 증강현실(AR)이나 혼합현실(MR) 기술이 대표적이며, 교육이나 재난 대응 훈련 등에서 실제 환경의 위험 부담 없이 몰입감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핵심은 이 가상 환경이 현실의 대체물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더 명확히 인식하고 통과하게 돕는 훈련장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