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 해석/기술을 가진 아이

〈기술을 가진 아이〉 03. 기억과 학습

비로소 소장 2025. 12. 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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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에 숨긴 실패, 기술이 제안하는 지름길

노진구는 시험지를 숨긴다. 빵점짜리 점수가 적힌 종이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으며, 엄마의 눈을 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비밀은 늘 탄로나고, 야단이 이어지며, 아이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도라에몽의 세계에서 이 장면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공부를 소홀히 한 아이, 들키고 혼나는 아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하는 매혹적인 기술의 유혹. 이 세계에서 학습은 언제나 '실패'라는 쓰라린 자리에서 출발하고, 기술은 그 실패의 흔적을 가장 빠르게 지워줄 수 있는 구원자처럼 나타난다.

도라에몽이 꺼내놓는 학습 기술들은 늘 명확한 목적지를 향한다. 암기빵을 먹으면 고통스러운 암기 과정이 사라지고, 실물 도감에서는 책 속의 지식이 곧바로 현실로 튀어나와 눈앞에 펼쳐진다. 복사 로봇은 나를 대신해 지루한 숙제를 끝마치고, 완결껌은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인공적인 확신을 주입한다. 이 도구들은 아이가 마땅히 겪어야 할 시간을 단축시키고, 불안한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게 만든다. 배움의 본질인 노력과 이해, 수많은 시행착오는 기술의 힘으로 압축되고, 아이의 손에는 오직 매끈한 '결과물'만 남는다.

 


사라진 서사와 소유되지 않는 지식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을 통해 얻은 정보는 과연 아이의 지혜가 되는가. 기억된 정보는 곧바로 깊은 이해로 이어지는가. 도라에몽의 학습 도구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작동하지만, 그 효과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암기한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책 밖으로 불러냈던 지식은 도구를 끄는 순간 다시 종이 속으로 돌아간다. 대신 해낸 과제는 아이의 입을 통해 자신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결과는 남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서사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민이라는 인물을 떠올려본다. 그는 단순히 기술 없이도 공부를 잘하는 천재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주변을 관찰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먼저 이해하려 애쓴다. 그 연후에야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고 실행에 옮긴다. 만약 영민이에게 도라에몽의 기술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공부를 회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탐구를 더 넓게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영민이는 지식을 단순히 소유하기보다,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하는 쪽에 가깝다.


정답을 찾는 능력과 질문을 던지는 태도

이러한 대비는 오늘날 우리의 학습 환경을 거울처럼 비춘다. 정보를 입력하고 결과값을 출력하는 효율성이 중심이 되는 학습은, 아이를 점점 기술의 수동적인 사용자로 만든다. 원리와 맥락을 짚어가는 즐거움보다 요령과 계산이 앞서고, 정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속도가 스스로 사고하는 힘보다 중요해진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보를 걸러내고 엮어내는 판단력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점점 '외우는 법'에만 익숙해진다. 문제를 푸는 요령은 늘어나지만, 정작 "이 문제를 왜 풀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태도는 흐릿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장에서 다룰 도구들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외운다는 것은 무엇이며, 배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해낸다는 보람은 결국 누구의 몫으로 남아야 하는가. 암기빵은 지식을 음식처럼 섭취하는 학습의 단면을, 실물 도감은 정보를 즉각적으로 눈앞에 불러오는 기술을, 복사 로봇은 학습의 주체가 나뉘는 상황을, 완결껌은 기술이 사라진 뒤 비로소 드러나는 태도의 힘을 보여준다. 이 도구들은 아이를 더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우리가 그동안 배움이라는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가를 보여준다. 


배움의 자리를 지키는 어른의 역할

이 장은 공부를 잘하는 비법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이 범람하는 세계에서 아이가 어떻게 자기만의 배움을 단단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배움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지루함을 기술로 덮어버릴 때 우리가 잃어버리는 가치가 무엇인지 살핀다. 그리고 그 길고 지루한 배움의 여정에 어른은 어디까지 함께 머물며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지, 그 책임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지적 외주화와 외부 기억 장치

인간의 뇌가 담당하던 기억, 계산, 판단 등의 기능을 외부의 디지털 도구나 시스템에 맡기는 현상을 말한다. 검색 엔진이나 스마트폰의 저장 기능이 대표적이다. 문화기술적 관점에서 이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하는 긍정적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 정보를 구조화하고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위험도 있다. 핵심은 기술에 '저장'된 정보가 인간 내부에서 '지혜'로 발효될 수 있도록 돕는 비판적 사고의 설계에 있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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