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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쿼드런트] 3.이름 없는 존재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흑인 여성의 주체성 분석

비로소 소장 2025. 12. 23.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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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쿼드런트: Cinema Quadrant]
'쿼드런트'는 원을 사등분한 사분면을 의미하는 수학 용어입니다. 정답을 골라야 하는 사지선다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위치를 확인하고 나아갈 방향을 사유하는 네 가지의 길입니다.
영화라는 거울을 사분면의 좌표 위에 올리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비로소 가치 있는 좌표를 찾아봅니다.

 

이 영화들은 20세기 중반 미국 흑인 여성들이 겪은 미국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서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방식은 21세기 (지금 여기 아시아를 사는)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때로 <컬러 퍼플>의 셀리처럼 자아를 찾아야 하고, 때로 <히든 피겨스>의 캐서린처럼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라, 주체성을 발현시키는 동력과 그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번에는 네 편의 영화를 하나의 좌표 위에 놓고 비교해 보려 한다. 그들이 처한 고통의 무게가 아니라, 그 고통 앞에서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어떤 가치와 책임으로 이어졌는가를 찬찬히 보다보면 지금 내게 주어진 문제들을 풀어내볼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 

네 편의 영화는 모두 흑인 여성의 주체성을 다룬다. 다만 그 안에서 주체성은 어떤 영화에서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또 어떤 영화에서는 공적 시스템을 전복하는 전문성으로 드러난다. 같은 차별의 역사 아래에서도, 주체성에 대한 인식과 보여주는 방식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제각각 갈라진다.

 


사적 공간의 혁명, 자아의 발견과 연대의 기록

<컬러 퍼플>과 <헬프>는 일상이라는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 주체성을 찾아가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주체성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기록에서 시작된다.

먼저 자매가 주고받는 편지형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두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컬러 퍼플>의 주체성은 처절한 고립 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적 해방으로 기능한다. 의붓아버지와 남편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며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살던 셀리가 평생의 억눌림을 뚫고 "나는 가난하고 검고 추할지 몰라도, 나는 여기에 있어(I'm here)!"라고 외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타인이 규정한 삶이 아닌 스스로의 의미를 구축해가는 자기 서사의 회복인 것이다. 보라색 꽃이 가득한 들판에서 그녀가 마침내 발견한 것은, 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자신 또한 축복받은 존재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반면 <헬프>는 동일한 사적 공간인 ‘집’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저항을 연대의 기록으로 확장한다. 백인 가정의 흑인 유모들이 아이를 키우며 겪는 수모를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유모 에이블린이 매일 아침 아이에게 "너는 친절하고, 똑똑하고, 중요해"(구어체로 are 대신 is를 사용하여 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라고 속삭여주는 순간이다. 여기서 주체성은 침묵을 강요받던 존재들이 증언자가 되는 과정이다. 그녀들의 보살핌의 윤리는 위험을 무릅쓴 비밀스러운 글쓰기를 통해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인식에 균열을 내는 사회적 힘이된다. 이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결과를 확인하려 들기보다, 일상의 틈새에서 나를 찾고 우리를 기록하며 주체성의 씨앗을 틔운다.


공적 시스템의 전복, 책임의 확장과 지적 승리

반대로 <틸>과 <히든 피겨스>는  공적 영역으로 나온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들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스템의 부당함을 직접 폭로하거나 그 규칙을 실력으로 압도하는 데 있다.

<틸>에서 주인공 메이미 틸은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백인 여성을 희롱했다는 누명을 쓰고 어린 아들을 잃은 비극을 겪는다. 인종차별로 잔혹하게 훼손된 아들의 시신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슬픔에 침몰하는 대신 "세상이 자신이 한 일을 보게 하겠다"며 아들의 관을 열어둔 채 공개 장례식을 치른다. 이는 사적 비극을 공적 정의로 승화시킨 정치적 책임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것이었다. 법정에서 차분하고 단호하게 증언하는 모습은, 가장 사적인 모성애가 어떻게 시대의 민권 운동을 촉발하는 거대한 주체성으로 숙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히든 피겨스> 역시 국가 기관인 NASA라는 거대 시스템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투쟁은 감정적 호소를 넘어선 지적인 승리로 나아간다. 유색인종 화장실을 가기 위해 비 오는 날 800m를 달려야 했던 캐서린이 젖은 몸으로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은 시스템의 모순을 처량하게 드러낸다. 결국 그녀는 전문성과 실력을 인정받아 구분짓던 화장실 팻말을 깨부수었다. 여기서 주체성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 칠판 가득 복잡한 수학 공식을 써 내려가며 인류를 우주로 보낼 궤도를 계산해내는 전문성에 있었다. 시스템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실력을 증명해냄으로써, 그녀는 제도적 차별을 스스로 넘어뜨렸다. 이 두 영화에서 주체성은 시스템의 문법 자체를 바꾸는 혁신의 이정표다. 


시대의 문턱을 넘으며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는가

이 네 편의 영화를 하나의 매트릭스 위에 올려보면 우리 삶을 지탱하는 두 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종과 성별이라는 교차적인 장벽 속에서도 사적 영역의 기록을 통해 자아를 지켜낸 인간, 그리고 공적 영역의 증명과 투쟁을 통해 시스템을 혁신한 인간의 대비다.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흑인 여성들의 과거를 동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사는 지금 여기 최근까지도 아시아 여성으로서 우리가 마주한 유교적 관습과 유리천장 역시 그녀들이 마주했던 벽과 모습은 다를지언정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는 내면의 목소리를 찾는 길을 알려주고, 어떤 영화는 세상을 향해 전문성으로 답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끝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차별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이 내 삶을 재단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어떤 책임감으로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이다.

결과를 바꾸는 상상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단 하나다. 만약 우리가 그녀들처럼 스스로를 기록하고 전문성으로 무장하여 시대의 벽 앞에 선다면, 우리 또한 비로소 고유한 자신의 이름으로 빛날 수 있을까.

 

시대의 기술과 문화, 그 안에서 삶의 가치를 읽습니다. 

비로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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