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을 가진 아이〉 03-1. 암기빵

저장된 기억은 지혜가 되는가

시험을 앞둔 노진구는 늘 그렇듯 불안하다. 공부는 하지 않았고, 시간은 부족하다. 국어와 수학 시험이 겹친 날, 그는 노력 대신 다른 길을 찾는다. 도라에몽이 꺼내든 암기빵은 그 욕망에 정확히 부합하는 도구다. 책에 찍어 먹기만 하면 내용이 그대로 기억된다. 이해도 필요 없고, 반복도 필요 없다. 기억은 먹는 순간 몸 안으로 들어온다.

암기빵은 지식을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섭취 가능한 물질’로 바꿔놓는다. 기억은 더 이상 축적의 과정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몸에 머무는 데이터가 된다. 진구는 이 도구를 통해 공부하지 않고도 점수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시험 범위는 많고, 빵은 계속 먹어야 한다. 결국 과도한 섭취로 배탈이 나고, 효과는 사라진다. 먹은 만큼 기억한 것 같았던 지식은, 몸 밖으로 빠져나가며 함께 사라진다.

이 실패는 단순한 코미디로 끝나지 않는다. 암기빵의 핵심은 ‘과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라기보다 기억과 학습이 얼마나 쉽게 분리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진구는 내용을 외웠지만, 그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정보가 있었지만, 문제를 해석하는 힘은 자라지 않았다. 암기빵은 기억을 주었지만, 판단을 주지는 않았다.

이 도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설정에 있다. 암기빵은 ‘컴퓨터 밀가루의 기억 분자’로 만들어진 먹는 컴퓨터라는 설정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인간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되는 데이터로 바라보는 사고를 드러낸다. 지식은 이해의 결과가 아니라, 저장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저장된 지식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임시 파일처럼 취급된다.

여기서 진구 친구인 영민이라는 존재가 대비된다. 영민이는 기술이 필요 없는 아이가 아니다. 그는 문제를 먼저 이해하고, 상황을 읽고, 그에 맞는 방법을 선택할 줄 아는 아이로 등장한다. 만약 영민이가 암기빵을 쓴다면, 그는 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한 요령으로 쓰기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암기빵의 효과 차이는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학습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암기빵 에피소드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기억을 많이 쌓는 법인가, 아니면 문제를 이해하는 법인가. 빠른 결과를 얻는 요령인가, 아니면 시간을 들여 사고하는 힘인가. 암기빵은 아이의 게으름을 비난하는 도구가 아니라, 성과 중심의 학습 환경을 그대로 반영한 거울이 아닐까.

기억은 학습의 재료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학습이 되지는 않는다. 암기빵이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은, 결국 스스로 통과하지 않은 과정에 대한 공허함이다. 진구의 실패는 이해 없이 얻은 결과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지점에서 어른의 태도가 중요해진다. 아이가 암기빵을 원할 때, 우리는 그 편리함을 제공할 것인가, 아니면 왜 그 지식이 필요한지를 함께 묻고 기다릴 것인가. 기술은 점점 더 많은 정보를 아이 앞에 즉시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보가 아이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하다. 이해는 저장되지 않고, 대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기빵은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그 기억이 지혜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아이 스스로 통과해야 한다.

*AI 기반 학습 보조 도구 (AI Tutoring / AI Study Assistant)
AI가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요약, 문제 풀이, 답안 생성을 제공하는 기술이다. 학습 속도를 높이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사용자가 사고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 소비할 경우 ‘이해 없는 학습’이 발생할 수 있다. 암기빵처럼 즉각적인 성과를 제공하지만, 지식이 자기 언어로 내면화되었는지는 보장하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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