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 해석/기술을 가진 아이

〈기술을 가진 아이〉 03-2. 실물도감

비로소 소장 2025. 12. 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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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꺼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

실물도감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읽는 대신 책을 털어 내듯 두드린다. 그렇게 원하는 사물이나 생물이 있는 페이지를 뒤집어 치면, 그것이 실물 크기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림 속의 음식은 실제로 먹을 수 있고, 자동차는 운전할 수 있으며, 생물은 살아 움직인다. 지식은 설명이나 이미지로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현실로 튀어나온다. 안경원숭이를 닮았다고 놀려도 안경원숭이가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 진구는 화를 내지 못했는데 실감도감으로 안경원숭이를 마주하자 깜짝 놀란다. 


이 도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학습에 바로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 그런데 실물도감에서는 그 순서가 바뀐다. 먼저 결과가 주어지고, 경험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다. 아이는 스스로 알아가며 시행착오를 겪기보다, 이미 준비된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 이해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지가 되어 뒤로 밀린다. 

노진구와 친구들이 실물도감을 사용할 때, 그들은 지식을 탐구하기보다 소유하려 한다. 눈앞에 나타난 물건은 곧바로 쓰임의 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책임은 쉽게 잊혀지고 만다. 실물도감에서 꺼낸 사물이 망가진 채로 다시 책에 들어가면, 책 속의 기록 역시 망가진 모습으로 남아 버린다. 이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채 다룬 지식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때조차 온전함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물도감은 학습을 편하게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위험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아이는 실패를 통과하며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완성된 결과를 먼저 손에 쥔다.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는 자연스럽게 설명되지 않는다. 지식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즉시 소비되는 자원이 된다.

오늘날의 학습 환경은 실물도감과 닮아 있다. 시뮬레이션, 실습 키트, 가상 실험은 아이에게 빠른 이해와 안전한 체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경험이 통과해야 할 과정인지, 아니면 대신 제공된 결과인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경험은 준비된 상태로 주어질 때보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을 때 비로소 배움으로 남는다.

실물도감이 보여주는 핵심은 분명하다. 지식을 눈앞에 꺼내는 일은 쉬워졌지만, 그 지식을 자기 삶의 일부로 만드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경험은 소비될 수 있지만, 배움은 자동으로 축적되지 않는다. 아이가 다뤄야 할 것은 결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맥락이다.

어른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분명해진다. 아이에게 더 많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보다,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다. 실물도감이 열어준 세계에서 아이가 길을 잃지 않도록, 경험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일테다.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현실 공간 위에 디지털 정보를 겹쳐 보여주는 기술이다. 실제 환경은 유지한 채, 설명·모델·결과를 즉시 눈앞에 호출할 수 있다. 실물도감처럼 AR은 지식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보게’ 만들며, 학습의 출발점을 과정이 아닌 결과로 이동시킨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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