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 해석/기술을 가진 아이

〈기술을 가진 아이〉 03-3. 복사로봇

비로소 소장 2025. 12. 2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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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대신 이루어질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복사로봇은 사람을 그대로 닮은 존재를 만들어 대신 행동하게 하는 도구다. 진구는 숙제도, 연습도, 귀찮은 일도 복제된 로봇이 처리하도록 한다. 적당히 조립하고 자기 머리와 선을 연결해두면 로봇은 갑자기 진구처럼 행동한다. 이 로봇은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그 외에 다른 공부를 하거나 발전적인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잠을 자고 놀러 나간다. 생각이 막히는 순간, 틀렸다는 감각, 다시 시도해야 하는 망설임은 복제본에게 넘어간다. 아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가없이 돌아온 결과와 배움 없는 시간이다.

이 도구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배움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우리는 흔히 점수와 제출물로 학습이 잘 되었는가를 판단한다. 복사로봇은 그 기준을 완벽하게 충족해준다. 그러나 학습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과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시간이다. 이해는 흔들리며 자라고, 숙련될 수록 몸에 남는다. 복사로봇이 대신한 순간, 그 숭고한 시간은 통째로 삭제되는 것이다. 



복사로봇의 사용은 책임의 감각을 흐리게 만든다. 성과는 내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문제가 생기면 로봇의 몫이 된다. 선택과 결과 사이의 연결이 느슨해질수록, 아이는 판단의 무게를 견디는 연습을 잃는다. 배움은 점점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단순히 일시적으로 처리된 일로 바뀌어버린다. 성취의 기쁨은 남을지 몰라도 실패를 통해 배우는 힘은 전혀 축적되지 않는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오늘의 학습 환경에는 이미 복사로봇과 닮은 기술이 가득하다. 자동 완성, 대필, 문제 자동 생성, 요약과 풀이의 즉시 제공은 시간을 단축시킨다. 기술은 효율을 높이고 접근성을 넓힌다. 그러나 기술이 대신 수행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아이가 통과해야 할 경험의 자리는 줄어든다.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구성과 표현의 방식을 배울 기회를 잃고 자기 생각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조차 골라내지 못한다. 빠르게 얻은 결과는 곧 사라지고, 남는 것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백이다.

여기서 어른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기술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의 주체를 되돌려 놓는 일일 것이다. 결과를 받기 전에 질문을 던지고, 과정의 흔적을 확인하며, 실패가 남긴 감각을 말로 정리하게 돕는 일이다. 여전히 기술은 도구로 머물러야 하고, 배움은 아이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대신해주는 기술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스스로 해낸 경험의 가치는 더 선명해진다.

복사로봇은 묻는다. 내가 하지 않아도 결과가 만들어질 때, 배움은 어디에 남는가.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질문은 아이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아이의 시간을 대신 처리해주고 안도하는 우리 어른들에게도 똑같이 되돌아온다.

 

*학습 분석 기반 개인화 추천(Adaptive Learning + Recommender)

아이의 정답률, 풀이 시간, 오답 패턴, 반복 학습 간격 같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아이에게 가장 효율적인 문제·영상·개념을 자동으로 골라 다음 순서까지 짜주는 방식이다. 성취감을 빠르게 쌓고 약점을 보완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추천이 과도해지면 아이가 무엇을 왜 배울지를 스스로 판단하고 우회로를 시도하는 경험이 줄어들 수 있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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