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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4D로 읽다 #02] 집안일은 소모인가, AI 시대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인가

비로소 소장 2026. 7. 27.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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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가사 노동과 효율이라는 잣대

효율과 성과, 명확한 지표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눈으로 가사 노동을 바라보면 참으로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깔끔하게 치워도 돌아서면 다시 어지러워지고, 정성껏 차린 식탁은 30분 만에 비워집니다. 눈에 보이는 단기적 수치나 성과로 남지 않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관리 서적에서는 가사 노동처럼 반복되는 일을 대표적인 비효율로 규정하곤 합니다. 서비스로 외주화하거나 가전제품을 활용해 최대한 시간을 아끼고, 그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는 충고를 자주 접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회를 작동시키는 숨은 인프라, '사회적 재생산'

그러나 사회학과 문화학에서는 가사 노동을 단순한 집안일이 아닌, 사회 전체와 경제 시스템을 지속시키는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의 핵심 과정으로 규정합니다. 비판이론가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를 비롯한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으로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짚어냅니다.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외벽과 인테리어이지만, 정작 그 건물을 안전하게 바로 세우는 것은 땅 밑에 묻힌 배관과 눈에 보이지 않는 기둥 같은 인프라입니다. 마찬가지로 기업과 시장이 매일 가동되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출근하고 정서적으로 회복하는 인간이 필요한데, 그 노동력을 매일 다시 재생산해 내는 가장 근본적인 인프라가 바로 가정 내의 가사, 돌봄, 정서적 지원입니다.

실제로 집안일의 주된 몫을 짊어지고 있는 많은 워킹맘과 전업주부들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쓸모없는 일만 한 것은 아닐까?" 하는 허무함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시장 경제라는 화려한 외벽 뒤에서 매일 삶을 다시 숨 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단단한 돌봄의 인프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다루는 집안일은 소모되는 시간이 아니라, 한 인간과 사회를 작동시키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치 있는 기틀입니다.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가치로 이 일을 많이 하는 엄마, 아내 혹은 여성이 그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 사회가 가정의 돌봄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중요한 일임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기술을 품어내며 지키는 '인간의 영역과 온기'


기술과 AI가 인간의 '생산성 노동'을 빠르게 대체해 나가는 오늘날, 이것은 결코 기계나 기술을 배척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의 가전제품과 기술은 가사 노동의 물리적 고단함을 지혜롭게 덜어주는 훌륭한 조력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배척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기술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과 정서적 온기'를 잊지 않는 태도입니다.

로봇청소기나 식기세척기 같은 기술은 물리적 공정을 대신해 줄 수 있지만, 공간에 온기를 채우는 '돌봄의 의지'나 '정서적 보살핌'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기술이라는 현명한 도구를 빌려 물리적 피로는 덜어내고, 그렇게 벌어둔 시간에 가족이나 스스로와 눈을 맞추며 정갈한 일상을 차리는 것. 기술이 줄여준 고단함의 여백에 따뜻한 돌봄을 채워 넣을 때, 우리의 일상은 비로소 흔들림 없이 단단해집니다.

기술의 효율 위에서 피어나는 삶의 주체성

가사를 돌보는 시간의 가치를 스스로 낮추거나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워버려야 할 비효율도, 의미 없이 바닥나는 시간도 아닙니다. 기술을 활용하며 내 삶의 터전을 직접 가꾸어가는 일상의 정성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주체성을 지켜내는 가장 강력한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의 집안일을 빨리 끝내버려야 할 숙제가 아닌, 내 삶의 뿌리를 단단하게 내리는 소중한 돌봄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을 제안합니다. 시대의 기술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지혜롭게 거느리되, 일상을 정성껏 돌보는 그 시간 속에서 비로소 내 삶을 지탱하는 깊은 안정감과 인간다운 온기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시대의 기술과 문화, 그 안에서 삶의 가치를 읽습니다.
비로소 문화브랜드연구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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