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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문화 브랜드 리뷰/영화 리뷰

[시네마 쿼드런트] 5. 수술대 위에서 찾은 사람의 자리: 네 가지 삶의 지도

by 비로소 소장 2025.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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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쿼드런트: Cinema Quadrant]
'쿼드런트'는 원을 사등분한 사분면을 의미하는 수학 용어입니다. 정답을 골라야 하는 사지선다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선 위치를 확인하고 나아갈 방향을 사유하는 네 가지의 길입니다.
영화라는 거울을 사분면의 좌표 위에 올리고, 그 안에서 우리 삶의 비로소 가치 있는 좌표를 찾아봅니다.

 

병원은 가장 적나라하게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는 곳이다. 그곳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마지막 경계이면서, 거대한 병원 조직의 힘과 힘없는 개인의 의지가 부딪히는 사회적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의학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순히 병이 낫는 과정이 궁금해서가 아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지배하는 수술실에서 가장 뜨거운 삶의 욕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단단한 조직의 벽 앞에서 사람의 품격을 지키려는 치열한 노력이 펼쳐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의학 드라마 속 의사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사투를 벌이며, 우리에게 잘 산다는 것과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다스리는 힘에 대한 욕심과 평범한 하루의 힘 - 하얀거탑과 슬기로운 의사생활

의술은 생명을 다루는 고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거대한 조직 안에서 움직일 때 때로는 누군가를 휘두르는 강력한 힘으로 변하기도 한다. 장중한 드라마 배경음악과 마찬가지로 하얀거탑의 장준혁에게 병원은 환자를 구하는 곳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싸우는 전쟁터로 보인다. 그의 뛰어난 수술 실력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보다 남을 이기고 조직의 꼭대기에 서기 위한 지배의 도구로 쓰인다. 장준혁의 비극은 의술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잃고 오직 출세의 수단이 되었을 때 그 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반면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주인공들에게 병원은 거창한 영웅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곳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보여준 권력관계나 정치적 갈등 상황연출을 역이용하면서, 이들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밥을 먹고, 농담을 주고받고,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이들의 다정함은 단순히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라, 거대한 조직의 압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려는 부드러운 저항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소통하는 모습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라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진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이들은 의술을 권력으로 휘두르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녹여냄으로써 병원이라는 차가운 공간을 사람 냄새 나는 곳으로 바꾼다.


정해진 규칙의 벽과 진심이 담긴 고집 - 굿 닥터와 낭만닥터 김사부

병원은 효율성과 위계질서라는 엄격한 규칙이 가장 강하게 작동하는 곳이다. 이 단단한 틀 안에서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은 자칫 의사로서 자격이 없는 것으로 오해받기 쉽다. 굿 닥터의 박시온은 뛰어난 의학 지식을 가졌음에도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서툴러, 병원 조직이 정해놓은 평범함의 기준에서 자꾸만 밀려난다. 초기에는 환자를 그저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대하던 그는, 동료들과 교감하며 점차 환자가 가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 진심으로 반응하는 의사로 성장한다. 드라마는 그의 성장을 통해 조직이 효율과 체계, 정상적인 소통만 따지느라 놓치고 있던 생명의 본래 가치를 되살리며, 의사의 진정한 자격이 어디에 있는지 되묻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는 조직의 모순을 정확히 알고 그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던지는 "열심히 사는 건 좋은데, 못나게 살진 말자 우리"라는 말은 단순한 잔소리가 아니다. 이는 돈의 논리와 복잡한 행정 절차에 파묻힌 현대 의료 시스템 안에서 의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힘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김사부에게 낭만이란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생명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켜내려는 가장 치열한 싸움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삶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의학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궤적은 우리에게 전문가라는 껍질을 넘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묻는다. 장준혁이 보여준 멈추지 않는 야망과 그 이면의 고독, '99즈'가 증명한 일상의 다정함과 연대의 힘, 박시온이 서툰 발걸음으로 배워나간 타인의 마음에 대한 존중, 그리고 못나게 살지 말자며 낭만을 지켜낸 김사부의 고집까지. 이들은 모두 각자가 처한 삶의 조건 속에서 '나다움'과 '존엄'을 지켜내기 위해 스스로 내린 치열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드라마가 비추는 병원은 결국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거대한 조직의 논리에 매몰된 부속품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깊이 사유하여 나와 타인의 소중함을 지켜내는 삶의 설계자가 될 것인가. 삶과 죽음의 임계점에서 분투하는 저들의 모습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일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만 우리는 삶에 대해 바로 볼 수 있는가. 지금 당신이 오늘 내리는 그 선택은, 과연 어떤 삶의 가치를 향하고 있는가.

 

시대의 기술과 문화, 그 안에서 삶의 가치를 읽습니다. 

비로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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