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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학교, 영웅서사 필수 요소에 대하여

by feelosophy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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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평점은 좋은 편은 아니나 넷플릭스 영화 '선과 악의 학교'는 스토리텔링 과목 공부한 콘텐츠전공 학생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그 이유는 이 영화(원래는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소재가 바로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이 되는 갈등의 두 대상인 선과 악의 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신화, 전설 혹은 역사는 기록한 자의 의도에 따라 사실과는 다르게 과장되거나 왜곡될 수 있으나 그만큼의 상징성을 부여받기도 한다. 그래서 다소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함이라 할지라도 어느정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러므로 전설 혹은 전래동화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선과 악의 대립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한 에너지이며 그 균형감각이 이야기의 흥미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선과 악의 학교'는 선과 악이라는 전형화된 이미지를 유치하게 드러내는 한편, 신화화 되지 않은 선과 악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왜 선은 아름답고 고귀하며 교양이 넘치며 행동에는 기품이 흐르고 절차와 형식, 전통을 고수하려 하는가. 왜 악은 외모를 망가뜨림으로써 자유를 누리며 가식, 형식을 부수고 원하는대로 바로 지금에만 집중하려 드는가. 라는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런 전형성을 비꼬려는 의도는 이런 너무 전형적이어서 평면적일 수밖에 없는 선과 악으로 나뉜 두 학교에 전혀 반대의 캐릭터를 떨어뜨려서 분란을 만드는것으로 드러난다. 즉, 더럽고 기괴하고 음산하며 고통이나 죽음을 이야기하는 악의 공간에는 금발의 백인 미녀가 떨어지는가 하면, 아름답고 넓고 쾌적하고 향기로운 공간에는 마녀로 왕따를 당하던 흑인 곱슬머리 여자아이가 뚝 떨어진 것이다. 

애시당초 이 영화를 내용을 흥미로 들여다 본 것이 아니기에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영웅의 여정의 단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상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조셉캠벨은 신화 속 영웅의 여정을 정리하였는데, 이후 콘텐츠 구성을 위한 연구로 크리스토퍼 보글러가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를 통해 신화속 주인공인 영웅의 여정을 12단계로 정리하여 이야기 원형 구조를 제안한 바 있다. 이 기본 골자를 중심으로 조금 비틀거나 인물을 각색해서 이야기가 생성되고 그 이야기가 주는 매력, 장소성, 갈등의 구조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하였다. 나중에는 이같은 구조가 하나의 장르화되기도 하여 일종의 공식처럼 사용이 되었지만 이제는 비틀거나 다수의 영웅이 각자의 월드를 구원하는 메타스토리를 제안하는 등 다양화되고 있다. 

영웅의 여정은 크게 일상과 비일상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3막 구조에 맞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일상에서 비일상의 공간으로 떠났다가 업그레이 된 주인공이 마침내 영웅이 되어 귀환한다는 내용이다. 즉, 출발과 분리 - 하강,입문,통과 -귀환의 3단계가 그것이다. 다시 12개의 구성으로 나누어 본다면,

  • 1.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때로는 다소 결핍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2. 소명을 받고 
  • 3. 일단은 소명을 거부한다. 
  • 4. 멘토를 만난다. 
  • 5. 관문을 통과하여
  • 6. 시험에 들고 협력자, 적대자를 만나게 된다. 
  • 7. 동궁 가장 깊은 곳까지 접근하고
  • 8. 큰 시련을 겪게 된다. 
  • 9. 보상을 받고
  • 10. 귀환의 길에 오른다.
  • 11.부활
  • 12. 영약을 가지고 귀환한다. 

Plot Strucutre: Joseph Campbell's Hero's Journey - Calling Card Books

 

만약 이 영웅의 여정을 그대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든다고 가정한다면, 영웅이 될 주인공, 멘토와 조력자, 적대자라는 캐릭터가 필요하다. 주인공이 선이라면 당연히 적대자는 악이 되며, 그를 뒷받침하는 조연인 멘토와 조력자가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선과 악의 학교'로 돌아와서 본다면, 이 영웅의 여정에서 주인공이 아닌 적대자와 조력자들은 들러리가 되거나 희생자가 되어야만 한다. 아서왕의 아들인 왕자는 선의 중심이 되고 아빠 혹은 엄마가 악인이었던 자녀들은 대를 물려받아 다시 악인이 되어 기괴한 모습과 행동을 답습하고 그 가운데 처절하게 패배한다는 동화를 양산하게 되는 희생양이 된다. 또 그 가운데 낙제한 아이들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기약없는 세월을 철저하게 주변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우리는 어떠한가. 비록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대단한 능력을 얻을 일은 없으며, 모험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영웅이 되어볼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명확한 선이라는 것이 없고 그래서 악도 없다. 단지 법규 규칙, 도덕 등의 가치가 합의 되어 그 범위 내에서 서로에게 자극이 되지만 않으면 된다. 상황에 따라 갈등의 국면에서 누구든지 선이 되기도, 악이 되기도 혹은 주변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걸 누군가 확정적으로 선은 이래야만 하고 악은 이래야만 한다고 교육을 하는 학교가 있으니, 시대착오적인 공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급기야 선과 악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녀석들이 각자의 공간에 분란을 만들면서 선과악의 학교는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선의 공간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다. 선은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결국에 몸에 상해를 입거나 피해를 보게 된 건 악이었고, 왕따를 시키거나 비난하거나 하는 장면도 선의 공간에서 드러냈다. 여자들은 아름답게 웃는 법과 아꾸미는 법을 연마하고 남자들은 말을 타고 검술을 익히고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꽃을 주는 역할로 한정된다. 그러나 악의 사회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구시대, 옛날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선이라면 지금의 혼돈, 개성 혹은 개인주의와 같은 모습이 악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영화의 주제가 사랑보다 우정, 선과 악을 규정할수 없다는 쪽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인 것에 나는 선과 악의 경계와 역할이 단지 스토리에서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에게 어떠한가를 덧붙이고 싶었다. 지금의 선과 악은 딱 규정할 수 없다. 누구도 옳고 누구도 그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상황과 시간에 따라 지혜로운 결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끈기와 노력이 필요하고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할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소리 높이고 악이 선인냥 군림하거나 누구도 선이 아니라 우기기만 한다면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켜 나중을 살아갈 우리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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