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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해석/기술을 가진 아이

〈기술을 가진 아이〉 02-2. 시간을 여는 서랍

by 비로소 소장 2025.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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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향한 의도적인 발걸음: 서랍이라는 통로

도라에몽의 타임머신은 흔히 '서랍'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노진구의 책상 서랍은 타임머신이라기보다, 시간을 향해 들어가는 입구다. 아이는 이 익숙하고 일상적인 통로를 지나 비로소 시공간의 파도를 넘는다. 시간은 어느 날 우연히 열리는 마법이 아니라, 도구를 통해 의도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동의 대상인 셈이다. 

타임머신은 과거를 고치기 위한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화살표는 언제나 현재의 나를 향해 있다. 과거의 실수를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의 불행이 씻겨나갈 것 같고, 미래를 미리 훔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도라에몽의 세계에서 행복은 늘 현재에 머물지만, 그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가로지르는 긴 여행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그 모양이 온전해진다.

 


예측과 불안 사이: 왜 미래를 훔쳐보는가

노진구가 시간을 열고 싶어 하는 순간은 늘 무언가 부족하고 힘든 때다. 시험을 망쳤거나, 누군가에게 크게 혼났거나, 친구와의 관계가 어긋났을 경우가 그 예다. 그는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 한다. 이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포부라기보다, 지금의 결과물을 지워버리고 싶은 회피에 가깝다.

미래로 향하는 욕망 역시 본질은 같다.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미리 확답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잘 될지, 혹은 실패할지. 미래를 보고 싶은 욕망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확실한 정답을 얻고 싶은 갈증이자 불안의 표현이다.

이러한 욕망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인류는 오랜 시간 역사를 기록하며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썼고,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며 실패하지 않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해왔다. 과거는 교훈이 되었고 미래는 계획이 되었다. 즉, 시간은 언제나 현재를 더 잘 살기 위한 전략적인 참고 자료로 쓰여 왔다.


잠시 미뤄둔 선택과 남겨진 책임

그러나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이 시작된다. 만약 우리에게 정말 타임머신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실패해도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것일까? 혹은 이미 정해진 결말을 확인한 채, 그 결과를 향해 무기력하게 오늘을 통과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타임머신은 스스로 내리는 선택을 돕는 조력자일까, 아니면 선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결정을 미루게 만드는 장치일까.

도라에몽은 이 질문에 정답을 내놓는 대신, 기술의 속성을 넌지시 일깨운다. 그는 미래란 바위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계기로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여는 서랍은 언제든 열 수 있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통과할지는 온전히 아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이 구조에서 타임머신은 예언의 도구가 아니라 선택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과거로 돌아가도 후회는 남고, 미래를 보고 와도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술은 가능성을 넓혀주지만 성장은 결코 저절로 따라오지 않는다. 공간은 이동할 수 있어도, 그 자리에서 일어난 책임까지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있는 기술, 살아내야 하는 태도

그래서 타임머신 이야기는 자주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돌아온다. 아이는 시간을 다녀왔지만 현재의 상황은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오직 마음의 깊이뿐이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 되고, 뜬구름 잡던 기대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바뀐다. 기술은 미래를 미리 맛보게 해주었지만, 진짜 변화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시작된다.

이 지점에서 어른의 태도는 분명해져야 한다. 아이가 시간을 되돌리거나 미래를 미리 확인하고 싶어 할 때, 그 욕망을 단순히 누르거나 무조건 들어줘서는 안 된다. 예측은 참고 자료일 뿐, 결정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결과를 미리 볼 수 있는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지금의 선택을 끝까지 살아내는 태도'는 더욱 소중한 가치가 된다.

시간을 여는 서랍은 우리에게 묻는다. 미래를 미리 알게 된다면 우리는 더 용감해질까, 아니면 더 비겁해질까. 그리고 그 예측된 결과를 알고도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며 오늘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서랍 앞의 아이뿐만 아니라, 과거를 되살리고 미래를 계산하며 불안을 지우려는 우리 시대의 어른들에게도 똑같이 되돌아온다.



* 예측 모델과 시나리오 플래닝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상황을 바탕으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길을 미리 가정하고 비교하는 방법이다. 정책이나 교육, 경영 등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활용하며, 결과를 확정하기보다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로 사용한다. 핵심은 '예측'이 '선택'을 대신할 수 없으며, 책임은 언제나 현재의 결정에 남는다는 점이다.


〈기술을 가진 아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기술을 가진 아이 앞에서 어른의 책임과 태도를 묻습니다.

— 비로소 소장 장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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